REMNANT 잡지

의료

냉소에 대처하기

원문 발행호The Heartbeat of the Remnant · 2024년 여름

“월드런 선생님, 엘시에게 도움이 필요합니다!” 엘시의 남편은 나를 바라보며 단호하게, 거의 화를 내듯 말했다. 반면 엘시는 마치 그 자리에 없는 사람처럼 바닥만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이 부부를 처음 만났기에, 그녀를 돕기 위해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파악하는 데 조금 애를 먹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나요?” 나는 그녀의 진료 기록을 넘기며 물었다. 아직 종이 진료 기록을 쓰던 시절이라 검사 결과가 있는 부분을 찾아보았다. 눈에 띄는 심각한 이상은 없었다. 간 효소 수치가 약간 높았지만, 그 밖에는 모두 괜찮아 보였다.

“술 때문입니다!” 남편이 말했다. “매일 밤 마시는 양이 점점 늘고 있어요. 위스키를 사러 갈 때 말고는 밖에 나가지도 않습니다. 매일 밤 정신을 잃을 때까지 마시고, 아침마다 하루를 시작하려면 술을 좀 마셔야 해요.”

“사실인가요?” 나는 배심 재판을 주재하는 판사가 된 듯한 기분으로 엘시에게 물었다.

“네.” 그녀가 말했다. 얼굴에는 아무런 감정도 드러나지 않아, 그녀가 그 자리에 있고 싶어 하는지 아닌지 알 수 없었다.

“도움을 받고 싶으신가요?”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여러 의미가 담긴 질문이었다. 알코올 중독으로 고통받는 많은 사람은 자신을 바이스처럼 꽉 움켜쥔 그 속박에서 벗어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어쩌면 엘시는 다를지도 몰랐다.

“그런 것 같아요.” 그녀가 무심하게 말했다. 이번에도 그녀가 그 자리에 있고 싶어 하는지 아닌지 알 수 없었다.

“술을 완전히 끊지 않고 지금처럼 계속 마시면, 일 년 안에, 길게 잡아도 어쩌면 이 년 안에 목숨을 잃게 될 겁니다.” 나는 그녀에게 말했다. “원하신다면, 해독 치료를 받고 술을 끊으실 수 있도록 입원 치료 프로그램을 찾아보겠습니다.”

“아내는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남편이 단호하게 말했다.

술을 많이 마시는 사람을 대할 때는 의료 지원 없이 무작정 술을 끊지 않도록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갑자기 음주를 중단하면 몸에 금단 증상이 나타나며, 이는 진전섬망이라는 상태를 일으키고 심지어 발작까지 유발할 수 있다.

나는 전화를 걸기 위해 진료실을 나섰다. 어떤 종류의 물질이든 그 의존에서 벗어나 재활을 시도할 수 있는 곳을 찾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엘시를 받아 주고 위스키를 끊도록 도와주겠다는 시설을 찾기까지 한 시간 반이 넘게 걸렸다.

그녀의 진료실로 다시 들어가며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가 갈 곳을 아무 데도 찾지 못할까 봐 걱정했었다.

나는 두 사람에게 계획을 설명했다. 남편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지만, 엘리스는 계속 말없이 바닥을 바라보았다. “가시기 전에 함께 기도해도 될까요?” 내가 묻자 두 사람은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들과 함께 기도하며, 두 사람의 삶에 자유와 예수님의 임재가 있기를 간구했다.

두 사람은 해야 할 일과 찾아갈 곳에 대한 안내를 받고 내 진료실을 떠났다. 나는 한 걸음 더 수고하여 이 중년 부부의 삶에 실제로 변화를 가져왔다는 생각에, 그날 오전 내내 마음이 뿌듯했다.

오후 2시쯤 재활 시설에서 전화가 왔다. 엘시도 남편도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고 했다. 화창하고 햇볕이 밝은 날이었고 시설도 그리 멀지 않았기에 뜻밖이었다. 나는 마음이 가라앉는 것을 느끼며 그 부부의 전화번호를 눌렀다.

“아내가 가지 않겠답니다!” 남편이 말했다. “자기는 미리 그렇게 말했었다고 하네요. 술을 줄여 보겠지만, 재활 시설이나 그런 곳에 들어갈 생각은 없답니다. 마음이 바뀌면 연락하겠다고 그쪽에 전해 주시면 될 것 같아요.”

간호사가 재활 시설에 전화해 좋지 않은 소식을 전했고, 나는 망연자실하여 의자에 앉았다. 내가 더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엘시에게 도움이 될 방법이 있었을까? 내가 다른 말을 했더라면 그녀의 삶에 변화를 가져올 수 있었을까?

약 일 년 뒤, 엘시가 집에서 세상을 떠났다는 슬픈 소식을 들었다. 그녀가 재활 치료를 받고 자신의 삶을 예수님께 맡겼더라면 상황은 달라졌으리라고 나는 확신했다. 어느 것도 이루어지지 않았고, 나는 냉소가 내 마음속으로 밀려드는 것을 느꼈다.

어두운 등 안에서 빛나는 전구.

냉소

우리는 냉소의 시대에 살고 있다. 고대 그리스의 견유학파 사람들은 툴툴거리며 사람들에게 야박한 말, 그들 자신은 진실한 말이라고 했을 법한 말을 하는 데 일가견이 있는 별난 무리였다. 그들은 흔히 누더기를 입었으며, 예의를 중시하는 아테네 사람들 대부분이 가까이하고 싶어 하지 않을 만한 행동을 했다.

오늘날 냉소란 사람과 상황을 최악의 관점에서 보는 경향을 뜻한다. 냉소적인 사람들은 모든 사람이 오로지 이기심으로 움직이며 나쁜 일들이 우세하게 되리라고 믿는다.

많은 젊은 의사는 이상주의적이며 희망에 차 있다. 최선을 다하면 환자들의 삶에 실제로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고 믿는다. 안타깝게도 시간이 흐르고, 온 힘을 다해 노력해도 환자들이 변하지 않으면 포기할 수 있다. 이런 의사들은 여전히 노력하지만, 자신의 노력이 큰 변화를 가져오리라는 진정한 희망은 더 이상 품지 않는다.

정치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흔히 아주 선한 의도를 지닌 듯하다. 그들은 정치를 사회를 더 나은 방향으로 바꾸는 길로 여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시간이 흐르고 권력을 잡은 얼굴들이 바뀌어도 정책은 실제로 달라지지 않으면서, 냉소적으로 변하는 경향이 있다.

때로 이런 냉소는 모든 정치인을 향한다. 때로는 자기 정당의 입장에 반대하는 정당의 구성원들에게 향하는 분노일 뿐이다. 희망은 냉소로 대체된다.

성경 속의 냉소

성경에서 냉소적인 사람이 쓴 것처럼 보이는 책이 있다면 전도서일 것이다. 우리가 솔로몬이라고 이해하는 전도자는 기쁨을 찾으려 애쓰며 시도했던 모든 일을 열거한다.

2:17-23에서 솔로몬은 일을 헛된 것으로 묘사한다. 그는 이렇게 말하며 마무리한다. “사람이 해 아래에서 수고한 모든 일과 마음의 괴로움으로 무엇을 얻는가? 그의 모든 날은 슬픔이며 그의 수고는 근심이다. 참으로 밤에도 그의 마음은 쉬지 못한다. 이것 또한 헛되다.” (전도서 2:22,23)

그는 세상이 폭군들에게 지배당하고 있으며, 사람들이 그에 대해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고 보았다. 솔로몬은 정치 권력이 무의미하다고까지 말했다. “가난하고 지혜로운 아이가 더 이상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는 늙고 어리석은 왕보다 낫다. 그는 감옥에서 나와 왕이 되지만, 그의 나라에서 태어난 자도 가난하게 된다” (전도서 4:13).

전도서 6:6에서 그는 장수를 낮게 평가하는 듯하다. “참으로 그가 천 년을 두 번 산다 해도 좋은 것을 보지 못한다면, 모두 한곳으로 가는 것이 아닌가?”

물론 그는 젊은 날에 우리의 창조주를 기억하라는 가르침으로 이 짧은 책을 마무리한다. 솔로몬처럼 늙고 지쳐 냉담해진 뒤가 아니라, 아직 기력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을 때 하나님께 마음을 두기로 선택하는 사람들에게는 복이 있다.

그 후에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을 포기하신 것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그분은 여전히 그들에게 선지자들을 보내셨지만, 백성이 반응하기를 거부하리라는 것을 분명히 알고 계셨다. “그러므로 너는 이 모든 말을 그들에게 전하여라. 그러나 그들은 네 말을 듣지 않을 것이다. 너는 또한 그들을 불러라. 그러나 그들은 네게 대답하지 않을 것이다” (예레미야 7:27).

신약에서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사람들이 더 이상 건전한 가르침을 듣지 않을 때가 올 것이라고 말했다. “그들이 건전한 가르침을 견디지 못할 때가 올 것이다. 그들은 귀를 즐겁게 해 줄 말을 듣고 싶어 자기 욕망을 따라 자신들을 위한 스승들을 잔뜩 모을 것이다” (디모데후서 4:3).

이런 구절들만 골라 읽으면, 미래에 대해, 더 구체적으로는 인간이 변화하려는 의지에 대해 매우 암울한 관점을 갖게 될 수 있다. 주변 사람들에게 우리 자신을 쏟는 일은 별 의미가 없어 보인다. 그들은 괴로움으로 가득하며, 그들이 변할 가능성은 다람쥐가 미분학을 완벽히 익힐 가능성만큼이나 희박해 보인다.

냉소의 반대

냉소의 반대는 희망이다. 미래가 더 나아질 수 있다는 믿음이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서 환난에 관해 말한 것은 흥미롭다. “그뿐 아니라 우리는 환난 가운데서도 기뻐한다. 환난은 인내를 낳고, 인내는 연단된 품성을 낳으며, 연단된 품성은 소망을 낳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소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는다. 우리에게 주신 성령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졌기 때문이다” (로마서 5:3-5).

우리는 자신이 겪는 시련을 기뻐하는 데까지 이르지 못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시련은 분명 바울이 언급한 다른 것들을 우리에게 가져다주어야 한다. 우리는 시련을 겪으면서도 인내와 연단된 품성에서 자라나며, 그뿐 아니라 위대하신 하나님을 섬기기에 내일을 향한 희망이 있음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의 이야기 속 대조는 희망에 대해 많은 것을 가르쳐 준다. 아버지와 맏아들은 태도에서 뚜렷한 차이를 보였다.

아버지는 희망을 버린 적이 없었다. 아들이 자신을 실망시켰고, 옳다고 알고 있던 길에서 멀리 벗어났음을 알면서도, 아버지는 여전히 그 탕자가 정신을 차리고 집으로 돌아오기를 바랐다.

반면 형은 동생에게 아무런 희망도 품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에게 화가 나 있었다. 탕자는 자기 돈을 낭비했고 죄 가운데 살았으며, 이제 돈이 떨어졌다는 이유만으로 집에 돌아온 것이었다.

분명 작은아들을 신뢰할 이유는 없었다. 그런데도 바로 그것이 하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일이다.

올바른 곳에서 희망을 찾으라

문제의 일부는 우리가 잘못된 곳에서 희망을 찾는다는 데 있다. 여러 해 전, 한 대통령 후보가 “희망과 변화”라는 구호를 내걸고 출마했다. 그러나 그가 당선되었음에도, 대부분의 사람은 자기 삶이 더 나은 방향으로 크게 달라졌다고 느끼지 않았으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밝은 야생화와 풀 사이에 있는 나비.

이 세상이 가치 있게 여기는 것들, 곧 정치 권력과 부를 추구하면 반드시 공허함을 얻게 된다. 이것이 사탄의 방식이다. 그는 언제나 넘치게 약속하고, 약속한 것보다 적게 준다.

예수님을 시험할 때도 그는 이렇게 했다. “네가 엎드려 나를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겠다” (마태복음 4:8). 사탄이 제시한 모든 것 중 그 어떤 것도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이어지는 길을 통해 마침내 받으신 영광과는 비교할 수 없었다.

마찬가지로 사탄은 그리스도인들이 가치 있고 희망을 가져다줄 것들을 구하지 못하도록 관심을 돌리려 한다. 사탄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정치가 세상을 더 나은 방향으로 바꿀 뿐 아니라, 세상을 바꾸는 더 쉬운 길이라고 말한다.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꾸고, 이어서 형제자매들도 자신의 삶에서 그와 같은 관계를 세우도록 도울 때 희망을 키워 간다고 분명히 말한다. 우리가 희망을 품을 수 있는 까닭은 사람들이 그토록 훌륭해서가 아니다. 그들이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래 살아 볼 필요도 없다. 우리가 희망을 품는 까닭은 가장 극심한 시련 가운데서도 우리와 함께 걸으시는, 경이롭고 신실하신 하나님을 섬기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받을 자격 없는 희망이 있음을 기억하라

용서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우리가 삶 속에서 다른 사람들을 용서해야 하는 주요 이유 중 하나가, 우리 자신이 받을 자격 없는 큰 용서를 받았기 때문임을 분명히 한다. 희망도 마찬가지다.

우리 각자는 희망이 없었고 희망을 얻으리라 기대할 근거도 없었지만, 그럼에도 어둠 속에서 한 줄기 빛을 받았다. 주변 사람들에게 좋은 일이 있기를 바라기가 그토록 어려운 이유 중 하나는, 은혜를 만나기 전에 우리가 얼마나 희망 없는 처지였는지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예수님께서 희망 없는 우리의 삶에 희망을 가져다주실 수 있었다면, 분명 우리 주변 사람들의 마음과 삶에서도 놀라운 일을 하실 수 있다. 우리가 포기해도 되는 사람은 우리 구주께서도 포기하신 사람들뿐이다.

작은 노력도 분명 변화를 가져온다

의학의 길로 들어서려 하며 외국에 가서 그곳 사람들을 섬길 계획을 세운 한 젊은이와 대화했던 일이 기억난다. 우리가 이야기하는 중에 한 연장자가 대화에 끼어들어, 자신은 개발도상국에서 변화가 일어날 희망을 거의 보지 못한다고 말했다.

그 나라 사람들은 나아지는 데 관심이 없고, 기생충 같은 것들을 막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일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런 환경에서는 의사와 간호사가 변화를 가져올 수 없다고 했다.

그 연장자가 이야기하는 동안 젊은이의 마음이 가라앉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경험이 있었고 희망을 버린 사람이었다. 슬픈 것은 그가 여전히 섬기고자 하는 마음을 지닌 사람의 희망마저 빼앗고 있었다는 점이다.

내가 수련을 받던 시절, 한 외과 의사가 가정의학과 의사들은 실제로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들은 그저 환자들이 다음 진료 때까지 살아 있게 할 뿐이지만, 외과 의사들은 문제를 일으키는 신체 부위를 적출하거나 절단하여 사람들을 정말로 “고쳐 준다”는 것이었다.

결국 작은 노력도 분명 변화를 가져온다. 나는 뇌수술을 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다른 누군가의 삶에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 어쩌면 그저 시간을 조금 내어 이야기를 듣고 기도하는 것만으로도 가능하다. 이것은 우리 모두에게 해당한다.

그뿐 아니라 이런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 우리 자신의 삶도 더 나은 방향으로 바꾼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예수님께서는 양들에게 그들이 “이 내 형제들 중 가장 작은 이들”을 섬길 때 곧 그분을 섬기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아무의 삶도 나아지지 않는다 해도, 우리 구주께서는 우리의 소망을 아시고 우리의 노력을 느끼시며, 언젠가 그 노력에 상을 주실 것이다.

기억해야 할 몇 가지

실패를 마주할 때 우리는 두 방향 중 하나로 움직이는 경향이 있다. 낙관적인 사람들은 이번 일이 일회적인 사건이며 미래는 여전히 밝다고 믿는 경향이 있다. 반면 비관적인 사람들은 실패가 영구적이고, 자기 자신에게 원인이 있으며, 삶 전반에 걸쳐 있다고 믿는다.

비관적인 사람들은 자신의 실패가 본래 지닌 성품의 결함에서 비롯되며, 이런 결함이 삶 전체에 영향을 주고 바뀔 가능성도 낮다고 믿는다.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는 의인과 달리, 이들은 넘어지면 넘어진 자리에 그대로 누워, 처음부터 패배하고 만다.

다른 사람들을 대할 때는 우리 자신에게 베풀어야 할 것과 같은 은혜를 그들에게도 베풀어야 한다. 그들도 자라고 있으며, 오늘 실패하더라도 내일은 더 잘할 것이다. 어쩌면 다시 실패할 수도 있지만, 적어도 “더 나은 실패”를 할 것이다.

맺음말

우리 세상에는 냉소가 만연하다. 많은 사람이 더 나은 미래에 대한 희망을 버렸다. 이 세상의 제도에 희망을 걸었던 이들에게는 이해할 만한 일이다. 정부에도, 군대에도, 관료 체제에도 참된 희망은 없다.

노래는 이렇게 말한다. “아, 예수님께 희망을 두지 못한다면, 이 세상은 얼마나 어두울까!” 예수님은 우리의 어둠 속에 빛을 가져오시고, 다른 이들이 우리를 실망시킬 때에도 계속 나아갈 수 있게 하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속하시는 분이다. 선지자들의 말이 무시당하고 그들이 박해를 받았음에도, 선지자들을 보내신 분이 바로 그분이다. 우리가 과거에 그토록 여러 번 그분을 실망시켰음에도, 계속해서 우리에게 희망을 품으시는 분이 바로 그분이다.

그분 때문에 우리는 계속 나아간다. 그분 때문에 우리는 자신뿐 아니라 우리의 형제들을 위해서도 희망을 품는다.

  • 어두운 등 안에서 빛나는 전구. · Brimming Focus Photography
  • 밝은 야생화와 풀 사이에 있는 나비. · Nathan Leinbach

잡지 출처

냉소에 대처하기. By Vincent “John” Waldron, MD Gladys, VA. The Heartbeat of the Remnant, 2024년 여름. 원문 쪽수 25–28.

The Berean Voi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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