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바람이 일어나 파도가 배에 부딪쳐 배에 물이 가득한지라, 예수께서 배의 뒷부분에서 베개에 엎드려 주무시더니 저희가 깨우며 이르되 선생이여 우리가 망하리니 상관이 없으시나이까 하니 예수께서 일어나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매우 큰 잔잔함이 있더라. 이에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어찌하여 너희에게 믿음이 없느냐 저희가 몹시 두려워하여 서로 말하되 이 사람은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니라. 마가복음 4:37-41
나는 이 본문을 여러 번 읽으며 여기서 무엇을 얻어야 할지 궁리해 왔다. 이 이야기는 풀어주는 것보다 더 많은 질문을 낳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종종 예수님을 삼위일체의 친화적인 면, 곧 우리와 전능하신 하나님 사이의 중개자 같은 분으로 생각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여기 성경 본문에서 그분의 행동은 인간적 잣대로는 도저히 생각하기 어려운 것이다. 어떻게 그리스도께서 그런 폭풍 중에, 더구나 물이 배에 차는 가운데서 잠을 주무실 수 있는가? 우리가 그분이 바람과 바다의 주인이어 명령하시면 복종한다고 믿을 수는 있지만, 그분이 우리에게도 똑같이 기대하시는가? 자비로운 그리스도께서 그런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우리에게 차분하고 두려움이 없기를 바라실까? 모든 두려움의 표시는 우리의 믿음 부족의 열매인가? 이러한 물음들은 불안하게 한다. 우리 모두 그분에 대한 믿음이 우리의 구원을 확보하기에 충분히 강하길 바라지만, 삶의 어려운 목초지를 걷는 우리의 경험은 제자들의 괴로운 울음소리 이상을 산출한 적이 거의 없다.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어찌하여 너희에게 믿음이 없느냐—이 질문들은 구세주께서 하시기에는 다소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마치 우리가 기대했던 것만큼 인내하시지 않는 분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제자들에게 도달 불가능한 기대를 두신 것이 아니다. 그분은 제자들에게 폭풍을 스스로 꾸짖으라 하셨는가? 더 일찍 깨우라 기대하셨는가? 조용히 노를 저어 자신 있게 계속하라 기대하셨는가? 여기 성경은 몇 마디 답만을 제공하지만, 두려움과 믿음에 관해 지속되는 교훈이 있음을 우리는 안다.
폭풍은 인생의 흔한 일부이며 어떤 중대한 곤경도 즐거운 것은 아니다. 바울이 로마로 항해할 때 그들은 …며칠 동안 해나 별이 보이지 아니하며 큰 풍랑이 우리에게 덮치니 우리가 구원을 얻을 소망이 전부 끊어졌더니 –사도행전 27:20. 흐리고 희망이 끊긴 가운데서도 한 가지 맑고 분명하게 울리는 종소리가 있다. 가장 끔찍한 상황 가운데서도 붙잡을 수 있는 평강이 있다는 것이다. 바울은 …하루와 밤을 깊은 바다에서 지내었고 –고린도후서 11:25라는 불안한 체험을 했으나 바람과 바다를 자기 권세로 굴복시키라 요구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그 폭풍 중에 …이 밤에 내 곁에 하나님의 사자가 서서 내가 누구의 것이며 누구를 섬기는 줄을 말하며 이르되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사도행전 27:23-24.고 말한다. 이것은 오늘 본문에서 제자들이 겪는 위험과 유사한 장면이지만 결과는 달랐다. 바울은 위로와 칭찬을 받았으나 제자들은 꾸짖음을 받았다.
잠깐 물의 무덤에 빠질 위기에 놓여 있었던 제자들이 외쳐 이르되 …선생이여 우리가 망하리니 상관이 없으시나이까 –마가복음 4:38.라고 하였다. 우리 모두가 분노와 책임을 타인에게 전가하는 것이 얼마나 자연스러운가를 알 수 있다. 어떤 무관심한 사람이 책임을 회피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매우 낙담스럽다. 같은 방식으로 …선장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무슨 일을 하는 것이냐 잠자는 자여 일어나 네 하나님께 구하라 혹시 하나님이 우리를 생각하사 우리가 망하지 아니하게 하실까 하니 –요나 1:6.
선장의 꾸짖음의 어조에는 잠든 요나에 대한 꾸짖음과 매우 유사한 날카로움이 있는 듯하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환난을 허락하시는 것을 기뻐하시는 것은 아니지만, 그분의 평강이 우리의 영혼에 넘치게 할 수 있는 다른 진실한 수단이 없는 것 같다. 먼저 골짜기가 있어야 우리가 산꼭대기를 소중히 여길 수 있지 않겠는가? 먼저 가시가 있어야 우리가 장미를 기쁘게 누릴 수 있지 않겠는가? 먼저 폭풍이 있어야 그 잔잔함을 감사히 여길 수 있지 않겠는가? 바울도 …측량할 수 없이 눌리고 능력을 넘어서서 사는 것까지 절망하였고 –고린도후서 1:8. 같은 절망을 겪었으나 그는 가슴 속에 영혼의 환상적 닻을 지니고 있었다.
이는 그가 명하사 바람을 일으키게 하시며 그 물결을 높이시나니 저희가 하늘로 오르고 다시 깊은 곳으로 내려가고 그 환난으로 인하여 그 영혼이 녹는다. 주리며 비틀거리며 취한 사람 같이 비틀거려 정신이 어둡다. 이에 그들이 환난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가 그의 환난에서 면하게 하시며 그 풍랑을 잔잔케 하사 그 물결이 잔잔하여지게 하시매 저희가 기뻐하니 여호와가 저희를 자기 원하던 피난처로 인도하셨도다 –시편 107:25-30.
바라던 피난처…
어쩐지 우리는 바라던 쉼터가 어떤 폭풍이 없는 지상의 유토피아라는 생각을 받아들여 왔다. 로마로 향하던 배를 인도하던 선장은 …그 항구가 겨울을 나기에 편한 곳이 못 될 줄을 생각하고 … 저희가 목적을 이룬 줄로 생각하여 –사도행전 27:12-13 항해를 시작했는데, 온화한 남풍의 암시에 첫 징후가 보이자 출항한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권하시는 피난처는 근심 많은 두려움과 초보적인 믿음으로부터 자유로운 항구다. 이는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한 평강을 내가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요한복음 14:27. 이 쉼은 그리스도와 함께 항해하며 각 폭풍을 통과하도록 그분께서 인도하실 것을 신뢰함으로써 얻는 것이다.
시련의 끈질긴 폭풍은 경고 없이 갑자기 …유라클리돈이라는 심히 급하고 심한 바람 –사도행전 27:14.처럼 일어날 수 있다. 이러한 격심한 바람들은 어떤 관계든 동요시키는 놀라운 대담성을 지녔다. 스트레스 상황에서 긴장하고 경계하는 것은 인간 본성이다. 우리의 중추 신경계는 아드레날린이라는 강력한 호르몬을 체내로 방출시키며 근육은 긴장하고 정신은 집중되어 싸움이나 도피에 대비하게 된다. 이것은 반드시 불안은 아니며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인간으로서 우리는 극도의 열정과 압박 가운데서도 이성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신성을 부여받았다. 제자들은 예수께서 무엇을 하실지 알지 못했다. 그들은 다만 이 상황이 통제 불능임을 알았을 뿐이다. 여기서 그들은 중대한 실수를 범했다. 그리스도는 누가 주관하시는지 아셨다. 바울도 누가 주관하시는지 알았다. 요나조차 왜 폭풍이 일어났는지 알았다. 불안이 증폭되어 우리가 치러야 할 시련을 우리가 통제해야 한다고 생각할 때 우리의 믿음은 실패하게 마련이다. 우리는 고귀한 의도와 진실한 마음을 가졌을지라도 흔들리는 믿음으로 지쳐버릴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이 하늘에 앉아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고 잘못 놀라지만, 우리의 기도가 충실히 올라가도 하늘은 대담하게 침묵하는 듯 보인다. 우리는 우상 숭배자들이나 배교자들에게서 그런 일을 기대할 수 있지만, 거듭나 교회에 규칙적으로 출석하고 성경을 읽고 날마다 기도하는 신실한 사람들에게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의 환경적 평화에 그렇게 관심을 두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내적 영혼이 그분의 쉼터에 안전하게 도달하는지를 더 염려하심을 다시 생각해야 한다.
우리가 행복할 때 우리는 그 쉼을 기쁜 마음으로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그분이 진정으로 필요하다고 느끼지 않을 때가 많다. 그분의 개입은 종종 방해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때가 절박하고 우리가 모든 자원을 다 소진하면 우리는 그분께 간절히 의지한다. 그 고통스러운 시간에 그분은 종종 우리의 성실함을 시험하시고 아무것도 제공하지 않으신다… 아무 것도 아닌 침묵만을. 배 안에서 잠자시는 그리스도. 우리가 가장 필요로 할 때 바로 그때 주무신다. 그리고 물으신다,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어찌하여 너희에게 믿음이 없느냐? 솔직히 말해 이것은 나에게 힘들고 심지어 냉정하게 느껴지며 보통 내가 예수께 기대하는 성품과는 다소 동떨어진다. 그러나 그 질문에는 답해야만 한다. 그 질문에 답하는 것이 그분의 쉼터에 들어가기 위해 필요하기 때문이다. 바람은 그분에게 순종하지만 우리에게는 순종하지 않는다… 혹은 순종하는가? 우리는 분명히 날씨나 환경, 상황 또는 주변 사람들을 통제할 수 없다. 그러나 이런 외적 요인들이 우리의 불안의 근본 원인은 아니다. 우리의 불안은 우리 자신의 그릇된 예감에서 비롯되어 우리의 영혼을 두드리며 평강의 문으로 들어가는 것을 막는다. 배를 공포로 몰아넣는 바람들은 밖에서 몰려오는 것이 아니라 내면에서 분출된다. 이 불안은 불신의 파도 위를 타고 다니며, 그리스도는 계속하여 신성한 잠에 있으시다가 우리가 불안의 근원을 깨닫고 믿음으로 소리칠 때까지 기다리신다. 이러한 네 가지 강한 바람은 우리가 조금만 자극을 받아도 일어난다—우리가…
…자기 보존을 유지하려 함
건강하고 가정과 재정이 순조로우면 우리는 상황을 잘못 해석하기 쉬울 수 있다. 순항이 하나님의 호의의 표지이고 환난이 그분의 불쾌의 신호라고 믿는 것은 잘못이다. 모든 선하고 온전한 은사는 하나님께로부터 오지만 쇠약하게 하는 폭풍도 그 범주에 들 수 있다. 우리의 개인적 환경은 일시적이지만 우리의 영혼은 영원하다. 하나님은 종종 우리의 개인적 편의를 소모하여 우리의 믿음을 확장하신다. 그러나 우리의 인격이 격하될 때 큰 두려움이 일어난다. 많은 공포증은 실제 위험이 부재한 가운데 발생한다.
- 고소공포증이 있는 사람은 높은 곳에서 떨어질 것이라는 두려움을 가지고, 그 장소가 안전하고 잘 보호되어 있어도 떨어질 가능성을 과대평가하여 괴로워한다. 수많은 다른 사람들이 그곳에 성공적으로 섰다 해도 그는 이 두려움에 갇혀 있으며, 이는 그가 위험에 처했기 때문이 아니라 떨어질 가능성을 심하게 과대평가하고 진실을 믿기 거부하기 때문이다.
- 동물공포증은 동물에 대한 두려움 속에서 살며, 찢겨 죽거나 내장이 드러날 것이라는 장면을 마음속에 만들어낸다.
- 폐쇄공포증은 좁고 작은 장소를 두려워하고, 광장공포증은 넓은 곳을 두려워한다.
- 아라치부티로포비아는 땅콩버터가 입천장에 붙는 것을 두려워하는 공포증이다.
공포증 대상과 맞섰을 때 그 사람은 심장이 빨리 뛰고 숨이 거칠어지며 입이 마르고 땀이 나며 어지럽거나 현기증을 느낄 수 있다. 따라서 그들의 공포증은 그들에게 현실이 된다. 대부분은 자신의 결함을 변명하지만 진실은 이 불안이 근거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자기 보존을 변명하고 그것을 채워주면 두려움은 필연적이다. 제자들은 자신들이 멸망할 것이라 두려워했으며 예수님은 그들에게 왜 그러하냐고 물으셨다. …떠나는 것이 차라리 낫고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더욱 좋다 –빌립보서 1:23가 아니겠는가. 우리가 삶을 그리스도께 맡길 수 있다면 죽음도 맡기지 못하겠는가?
무릇 자기 생명을 구하려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생명을 잃는 자는 찾으리라 –마가복음 8:35.
…재산을 지키려 함
외형상 그리스도의 삶은 기록된 바대로 가장 고난이 많은 삶 중 하나였다. 여우는 굴이 있고 공중의 새는 둥지가 있거늘 그는 흔들리는 배의 뒤편에 베개를 놓고 눕고 끊임없이 부딪치는 파도 아래에서 신음하였다. 그러나 그의 내적 안식처는 유리 같은 바다였다. 이는 부분적으로 그가 보호할 재산이 없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배도 빌린 것이었다. “돈이 많으면 걱정도 많다”라는 옛 속담처럼 부가 떨어지면 불안이 증가한다. …무리 중에 한 사람이 이르되 선생님이여 내 형에게 유산을 나눠 주라 하소서 –누가복음 12:13. 예수께서는 그 편을 들어주지 않으셨다. 대신 그분은 불안을 일으키는 탐욕스러운 마음에게 말씀하셨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재물을 주시면 우리는 죄책감을 느낄 필요가 없다. 그가 재물을 거두시면 우리는 불안할 필요가 없다. 폭풍 속에서 우리는 권면을 받는다: …담대하라. 너희 중 어떤 사람의 생명은 잃지 아니하리라 단지 배뿐이리라 –사도행전 27:22. 이것은 지친 선원들에게는 치료의 향유로 봉사했지만 재산을 지키려는 사람들에게는 불쾌한 이야기다. 부자 청년이 그의 지상 소유를 대가로 구원을 제안받았을 때 …그가 큰 재산이 있으므로 근심하며 가니라 –마태복음 19:22. 재산을 잃음에 불안해하는 우리도 어리석음을 면치 못한다.
…계획을 완성하려 함
우리는 어떤 항로를 설정한다. 직장을 바꾸거나 관계를 시작하거나 어떤 사역의 새 길을 떠날 수 있다. 우리는 믿음으로 출발했고 어느새 우리는 고군분투하고 있다. 일상 생활의 바람과 파도가 우리를 거스르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의 기대가 충족되지 않고 그리스도께서 제 역할을 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진다. 문제가 그리스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기대가 불안의 원인이다. 우리는 투자에 많은 것을 기대하고 우리의 노력이 헛되이 가는 것을 보고 낙담한다. 마르다는 부엌에서 도움을 받지 못함에 맥박이 빨라졌다. 잘 계획된 식사가 끝나지 않자 그녀의 좌절감이 일어났다. 그녀의 불만은 바다에서 노를 젓던 제자들의 불평만큼이나 책임을 묻는 것이었다. …주여 내 누이가 나를 혼자 두고 섬기게 하였으니 나보고 그에게 말하여 도와주게 하소서 –누가복음 10:40. 그녀의 불안은 마리아의 소홀함이나 그리스도의 무관심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니었다. 그녀의 자매는 이미 쉼터에 도착해 있었고 마르다는 마음속의 격렬한 감정과 싸우고 있었다. 완벽주의자는 자신의 이루지 못한 비전이 기대에 미치지 못할 때 스스로 폭풍을 일으킨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물에 찬 배보다 믿음으로 가득한 가슴을 더 염려하신다.
…남을 기쁘게 하려 함
성경은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라 가르치지만, 그것이 우리가 반드시 다른 사람의 승낙을 얻기 위해 애써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좋아하는 사람으로 보이는 것은 기분이 좋다. 거부당하는 것은 고통스럽다. 그래서 많은 영혼들이 깨어 있는 시간 내내 타인의 승인을 구한다. 그들은 동료들과 같이 입고, 같이 행동하고, 같이 말하고, 같이 살려고 한다. 이런 사람들은 스트레스의 파도로 가득한 삶을 산다. 새로운 지인마다 온갖 “만약에”라는 생각들이 밀려온다. 관계만큼 깨지기 쉬운 배는 없다. 사랑받기 위해 아무리 큰 희생을 하더라도 결국 우리를 절망의 나락으로 끌어내리는 실망스러운 폭풍을 만나게 된다. 우리의 최선이 실패하고 가장 친한 친구가 우리를 탈선시킬 때 우리는 상처 입은 배를 쉼터로 가져가야 한다. 불편하고, 불행하고, 불유쾌하고, 성가신 관계는 항상 존재할 것이다. 우리는 타인의 잘못된 행동을 변명하는 것이 우리 자신의 잘못을 변명하는 것보다 훨씬 낫다. 우리의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바람을 꾸짖을 수 있을 때 우리는 즉시 바라던 피난처에 있음을 발견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쉬는 것이 남아 있도다. 혹 쉬는 데 들어간 자는 또한 자기 일을 그치었은즉 하나님의 하심과 같이 하였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으로 들어가기를 힘쓰자… –히브리서 4:9-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