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 있는 사람이 죽은 사람과 함께 묻힐 수 없듯이, 죄에 대해 여전히 살아 있는 사람은 죄에 대해 죽으신 그리스도와 함께 세례로 묻힐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세례를 서두르는 사람들은 무엇보다 먼저 죄에 대해 죽어야 한다는 점을 우선적으로 유념해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 그리스도와 함께 세례를 통해 묻힐 수 있으며,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우리의 죽을 육체에 나타나도록, 우리는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고 다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몸에 나타나는 방식은 바울 자신이 다음과 같이 말하여 알려 줍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십니다.” 사도 요한도 서신에서 다음과 같이 쓸 때 바로 같은 것을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셨다고 고백하는 영은 모두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분명 이 구절에서 하나님의 영에 이끌린 사람으로 여겨질 이는 이 통상적인 고백의 말마디를 말하고 발음한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그렇게 형성하고 선한 행실의 열매를 맺어, 자신의 행위와 생각에 담긴 헌신으로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셨으며 자신은 죄에 대해서는 죽고 하나님께 대해서는 살아 있음을 입증한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묻힌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가능한 한 설명했으니, 이제 그분이 이어서 하시는 말씀을 살펴봅시다.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을 통하여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나신 것처럼, 우리도 새 생명 가운데서 살아가게 하려는 것입니다.” 앞서 말한 대로, 곧 우리가 죄에 대해 죽었다는 사실에 따라 그리스도와 함께 묻혔다면,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므로 우리도 그분과 함께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은 분명히 그에 부합합니다. 그리고 그분께서 아버지 오른편에 앉아 계시므로, 같은 사도가 다른 곳에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일으키시고 하늘에 있는 자리에도 그분과 함께 앉히셨습니다”라고 말한 것에 따라 우리도 그분과 함께 하늘에 앉아 있다고 일컬어질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의 영광을 통하여 살아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도—죄에 대해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묻혔다면, 우리의 선한 행실을 보는 모든 사람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므로—새 생명 가운데서 살아가도록 아버지의 영광을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일으켜졌다고 마땅히 일컬어질 것입니다. 새 생명 가운데 사는 것은 “그 행실과 함께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하나님을 따라 창조된 새 사람”, 곧 “자기를 창조하신 분의 형상을 따라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새로워지는 사람”을 입는 것입니다.
한 번 이루어졌다고 하는 생명의 새로워짐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이 새로움은 언제나, 날마다, 말하자면 거듭 새로워져야 합니다.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의 겉사람은 썩어 가지만 속사람은 날마다 새로워집니다.” 옛사람이 끊임없이 늙어 가며 날마다 더 나이가 들어 가듯이, 새사람도 끊임없이 새로워지며 새로워짐이 더해지지 않는 때란 없습니다. 믿음 안에서 진보하고 날마다 덕을 빛내는 이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이 어떻게 선한 행실에 더 나은 것을 늘 보태고, 고귀한 행위에 더할 더욱 고귀한 것을 열심히 찾으며, 이해와 지식과 지혜가 어떻게 풍성해지는지 살펴보십시오. 이전에는 충분히 분명하게 이해되지 않는 듯했던 것들을 나중에는 명백하고 뚜렷이 드러난 것으로 분별하게 됩니다.
이런 사람은 행실에서 날마다 새로워진다고 말하지 않겠습니까? 반대로, 앞서 말했듯이 늙기 시작한 사람은 계속 악화되어 날마다 더 늙고 자신 안에서 더욱 쇠퇴하는 것으로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새 생명 가운데서 살아가며 날마다 새 사람이 된 모습을 보이고, 말하자면 더욱 아름다운 사람이 되어, 거울에 비친 듯 우리 얼굴의 아름다움을 그리스도와 하나로 합시다. 주님의 영광을 바라보며,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나 땅의 낮은 자리에서 아버지의 위엄이 지닌 영광으로 올라가신 그리스도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됩시다. ~
토머스 P. 셰크(역), 오리게네스: 로마서 주석, 1-5권. 미국 가톨릭대학교 출판부, 2001년, 358-360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