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해를 재어 세운 연대표의 거대한 분기점 한가운데에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탄생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분은 이 자리를 정당하게 차지하십니다. 다른 어떤 도래도 인류에 이토록 예리한 영향을 미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탄생 이전의 해들은 B.C., 곧 “그리스도 이전”이라 불리고, 그 이후의 해들은 A.D. (Anno Domini, 라틴어로 “우리 주님의 해”)라 불립니다. 그분의 탄생은 이교의 영향과 개인적 방종으로 완전히 어지럽혀지고 혼란스러워졌지만, 그 순수하고 찬란한 아름다움은 꾸밈없는 그 장면을 솔직하게 바라보려는 모든 이에게 여전히 열려 있습니다.
달력은 그리스도의 탄생일을 12월 25일로 정했지만,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 날짜가 정확하지 않다고 결론 내렸습니다. 그분의 탄생 연도로 여겨지는 해 역시 실제 연도와 4~6년 차이가 난다는 사실도 밝혀졌습니다. 그 날짜는 로마의 주교가 사투르날리아라는 대중적인 이교 축제에 맞추어 정했습니다. 이교도 로마인들은 농업의 신 사투른을 숭배하며 잔치와 연회를 벌이고, 집을 상록수로 꾸미고, 선물을 주고받으며, 흥청거리곤 했습니다. 주교는 그 떠들썩한 축제에 성화의 영향을 끼치고 일반 대중의 마음을 이기적인 방종에서 성육신하신 하나님께로 돌리려 했습니다. 예상할 수 있듯이 이교 축제는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채 계속 같은 방식으로 이어졌습니다. 처음에는 그 제안에 눈살을 찌푸렸던 교회도 결국 그 생각을 받아들였고, 4세기 무렵에는 기독교와 이교가 뒤섞인 혼합 양식에 완전히 동화되어 그 가르침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는 난처한 문제에 놓여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탄생을 어떻게 여겨야 할까요? 크리스마스에 그리스도를 모시려 해야 할까요, 아니면 그분을 내보내야 할까요? 우리의 견해와 관계없이, 우리 각자는 혼합된 축하 행사에 얽힌 감정적 유대와 별개로 동정녀 탄생의 의미를 진실로 이해하고, 하나님께서 정하신 방식으로 그 탄생을 인정하기로 결심해야 합니다. 오늘날 그분의 탄생을 기념하는 수백만 명과 대조적으로, 실제 그 사건에 참석할 수 있었고 그럴 자격이 있었던 사람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그 지방에 목자들이 밤에 들에서 지내며 자기 양 떼를 지키더니, 보라, 주의 천사가 그들에게 나타나고 주의 영광이 그들을 두루 비추매 그들이 크게 두려워하더라. 천사가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 너희가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리라 하더니, 갑자기 그 천사와 함께 하늘의 큰 무리가 나타나 하나님을 찬양하며 이르되, 가장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평화, 사람들에게는 선하신 뜻이로다 하더라 –누가복음 2:8-14.
비천한 목자들의 무리가 첫 탄생 소식을 받았습니다. 이 어리석고 배우지 못한 사람들조차 고대하던 메시아를 알고 있었고 간절히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네가 유다의 수천 가운데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나를 위하여 나오리니, 그의 나아감은 옛적부터, 영원부터 있었느니라 –미가 5:2.
별이 수놓인 하늘이 생동감 있게 빛나자, 목자들은 눈앞의 장면을 황홀한 경외심으로 바라보았고 그들의 영혼의 지평에는 새날이 밝기 시작했습니다. 천사들의 무리는 목자들에게 소식을 선포한 뒤 곧 사라졌지만, 기쁜 소식은 남았습니다. 그 만남은 잠시 스쳐 가는 안개와도 같았지만, 이 사람들의 타오르는 마음에는 세 겹의 향기가 머물렀습니다. 구주… 표적… 그리고 노래…
…구주
구주가 약속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우리가 무엇인가로부터 구원받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육신의 형편이 어떠하든, 인간의 영적 상태는 에덴에서 타락한 이래 절망의 벼랑 끝에 놓여 있었습니다. 사천 년 동안 인류는 죄라는 악마적인 구름 아래 움츠려 있었고, 많은 이들이 그 위협적인 어둠의 희생양이 되었습니다. 죄는 희망의 촛불을 순식간에 꺼뜨릴 수 있습니다. 가장 아름다운 꽃에도 얼음장 같은 숨결을 내뿜어 순식간에 시들게 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부부를 데려다가 내면의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몰아넣습니다. 청춘의 순수한 꽃봉오리를 앗아 그 순결의 향기를 빼앗습니다. 죄의 개인적 지배라는 속박에서 벗어난 이들은 주변의 미친 사회에서 자신들이 가까스로 탈출했음을 쉽게 알아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겸손한 목자들은 구주의 오심을 기뻐했습니다.
모두가 죄를 지었고 그 정죄 아래 놓였습니다. 마땅히 받아야 할 형벌의 임박한 관할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신선한 공기를 들이마시는 듯합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정죄하려 하심이 아니요, 세상이 그분을 통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요한복음 3:17. 참으로 회심한 이들은 영혼에 영생의 소망과 천국의 약속을 품습니다. 성령께서 그들의 마음에 거하시면서 그들은 새로운 피조물이 됩니다. 이것은 신자의 삶에 극적인 영향을 미치지만, 구원의 문제는 이것만이 아닙니다. 이 구주는 또한 주님이십니다.
“구주”라는 칭호가 절박한 필요를 뜻하듯, “그리스도 주”라는 이름도 지배적인 승리를 뜻합니다.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이는 마귀가 처음부터 죄를 지음이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목적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 –요한일서 3:8. 우리는 죄의 정죄에서 해방될 뿐 아니라 그 죄의 권세와 영향에서도 구출되어야 합니다. 죄성 안에서 쌓아 온 우리를 쇠약하게 하는 습관은 치명타를 입어야 합니다. 그분의 영향력이 우리 삶에 임하기 전에 우리를 압도했던 정욕과 욕망은 그분께 복종해야 합니다. 관계를 파괴하고 우리 곁의 사랑하는 이들의 삶에 상처를 입힌 인간의 이기적인 교만과 끓어오르는 성질 또한 이 승리에 삼켜져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주님이 아니시라면 그분은 우리의 구주도 아니십니다.
이 아기는 누구신가, 누워 쉬시며,
마리아의 무릎 위 잠드셨나?
천사들은 아름다운 찬송으로 맞이하고,
목자들은 지켜보며 기다리네.
이분, 이분은 그리스도 왕,
목자들은 지키고 천사들은 노래하네.
어서, 어서 그분께 찬양을 드리세,
아기, 마리아의 아들을.
…표적
천사의 방문이 구유에 누인 아기보다 훨씬 더 큰 표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 가운데 누가 그토록 천상의 합창을 듣는 기쁨을 경험해 보았겠습니까? 이 이야기를 읽으며, 수많은 하늘의 목소리가 함께 울려 산비탈을 창조의 날 이후 이 땅이 알지 못했던 하늘의 빛으로 가득 채우는 황홀한 아름다움은 어떠했을지 상상할 따름입니다. 새벽 별들이 함께 노래하고 하나님의 모든 아들들이 기뻐 외칠 때에 –욥기 38:7. 그러나 천사들은 그 표적이 아니었습니다.
마태복음 1:20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듯 이 아이가 성령으로 잉태되었다는 사실은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하며, 지상의 표적으로 여길 수는 거의 없습니다. 아이가 포대기에 싸였다는 사실도 특별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모든 어머니가 그렇게 했기 때문입니다. 아이의 탄생을 묘사하는 가장 생생한 장들 가운데 하나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태어났을 때 아무도 돌보지 않았다고 말씀하십니다. 네가 태어난 날을 말하자면, 네 배꼽줄을 자르지 않았고 너를 물로 씻어 부드럽게 하지도 않았으며, 소금으로 문지르지도 않았고 포대기에 싸지도 않았느니라 –에스겔 16:4. 이런 단서들은 아이를 찾는 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이 사건의 결정적인 표적은 아기가 누운 요람으로 드러납니다. 필요에 쫓기지 않는 한 어떤 어머니도 가축 우리를 출산 장소로 택해 갓난아이를 여물통에 눕히지 않을 것입니다.
목자들에게는 구유라는 표적과 베들레헴에 관한 성경 지식만으로도 그 아이를 찾기에 충분했습니다. 성경은 마구간의 안락함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습니다. 목자들은 마을에서 짐승들을 두는 장소를 잘 알고 있었고, 그들의 여정은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도 자기 피로 백성을 거룩하게 하시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당하셨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그분의 치욕을 짊어지고 진영 밖으로 그분께 나아가자 –히브리서 13:12-13. 이 표적은 개인적인 참여를 요구합니다. 마음으로 그 장면에 충성을 바치는 모든 사람은 그분을 따라 나아가야 합니다. 살아 있는 성탄 장면을 보거나, “메시아” 공연을 관람하거나, 크리스마스 저녁 식사를 하러 할머니 댁에 가는 것으로 이 일이 이루어지지는 않습니다. 도마가 …동료 제자들에게 이르되, 우리도 그분과 함께 죽으러 가자 –요한복음 11:16라고 했을 때처럼, 우리는 그분의 고난에 참여해야 합니다.
그리스도 아기를 찾아가려면 여관 밖에 자리 잡아야 합니다. 여관 사람들 무리는 대중의 환영과 대중의 이해와 대중의 행동이 있는 곳입니다. 그곳에는 친구와 가족과 동료들의 안락함이 기다리고 있으며, 소속감과 받아들여진다는 느낌을 줍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태어나실 때도 죽으실 때도 그런 사치를 누리지 않으셨고, 여관 사람들 무리 밖을 택하셨습니다.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으며, 주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 그는 그 앞에서 연한 싹처럼,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처럼 자라나리니, 그에게는 모양도 아름다움도 없으므로 우리가 그를 볼 때 흠모할 만한 아름다움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받았으며, 슬픔의 사람이요 고통을 아는 자라. 사람들은 그에게서 얼굴을 가린 것같이 하였고, 그는 멸시를 받았으므로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이사야 53:1-3.
멸시받던 목자들은 삶의 대부분을 여관 사람들 무리 밖에서 살았으며, 그분을 처음으로 믿고 영접한 이들이었습니다. 그리스도께 충성하려면 세상의 충성에서 분리되어야 하며, 그 가운데는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리는 대부분의 인기 있는 축하 행사도 포함됩니다. 이는 진영 밖으로 나아가기로 하신 그분의 선택을 따라가라는 부르심입니다. 이것이 형식적인 예배와, 그분을 따라 구유까지 가려는 구속받은 이들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찬양의 차이입니다.
어찌하여 그분은 이토록 초라한 곳에 누우셨나,
소와 나귀가 먹이를 먹는 곳에?
선한 그리스도인들이여, 두려워하라. 여기 죄인들을 위하여
침묵의 말씀이 간구하신다.
못과 창이 그분을 꿰뚫으리라,
그분이 지신 십자가는 나와 너를 위한 것.
육신이 되신 말씀을 찬양하라, 찬양하라,
아기, 마리아의 아들을.
…노래
그분을 알고자 하는 이들은 여관 밖으로 나아가 …그분의 고난에 참여하고 그분의 죽으심을 본받아야 합니다 –빌립보서 3:10. 여관 사람들 무리의 조롱과 멸시를 받으면서도, 그들은 하늘의 노래가 자신들을 맞이한다는 사실을 발견할 것입니다. 가장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평화, 사람들에게는 선하신 뜻이로다 –누가복음 2:14.
이 땅에서 우리가 차지하는 몫이 줄어들수록 영광스러운 찬양의 분량은 늘어납니다. 유대인들은 메시아가 자신들에게 더 큰 몫을 주고 로마 세계를 상대로 승리를 거두게 하러 오지 않으셨다는 사실에 실족했습니다. 예수께서는 …그 도성을 보시고 우시며 이르시되, 너도 오늘, 곧 네 날에 네 평화에 속한 일들을 알았더라면 좋았으련만! 그러나 이제 그것들이 네 눈에 감추어졌도다 –누가복음 19:41-42. 땅의 평화는 환경이 완벽해진다고 해서 결코 얻을 수 없습니다. 여관에 머무는 사람들은 서로 깨끗하고 편리하며 예의 바른 교제 안에서 평화를 찾습니다. 이것은 세상이 장려하고 그려 보이는 대중적이고 호사스러운 평화이지만, 초라한 구유의 아기가 주시는 평화와는 일치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관 밖에 있던 이들이 그 노래를 배웠습니다.
그들은 새 노래를 부르는 듯하였고… 땅에서 구속받은 십사만 사천 명 외에는 아무도 그 노래를 배울 수 없었더라 –요한계시록 14:3. 이들은 땅에서 자신이 처한 형편에 만족하는 사람들입니다. 다른 사람이 승진하거나 더 많은 세상 재물을 소유하거나 더 많은 관심을 받더라도 흔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다른 이들이 성에 웅크리고 살아도 그들은 오두막에 만족합니다. 남들이… 그곳에 가고, 그런 일을 하고, 그것을 소유한다 해도 부러워하도록 설득당하지 않습니다. 다른 이들은 …너희가 그들과 함께 같은 방탕의 극한에 달려가지 아니하는 것을 이상히 여겨 너희를 비방하느니라 –베드로전서 4:4.
땅의 평화란 경건과 자족이 함께 가져오는 큰 유익에 지나지 않습니다. 어떤 이들은 다윗이 여러 아내를 두고도 어떻게 밧세바와 죄를 지을 수 있었는지 궁금해합니다. 그가 그러지 않을 이유가 있었겠습니까? 선택지가 많다고 자족이 더 커지는 것은 아닙니다. 상점에서 칭얼대는 아이는 손에 가득 쥐고도 더 가질 수 없어서 울부짖습니다. 오늘날 모텔을 꼼꼼히 따지는 사람들도 완벽하지 못한 숙소는 모두 깎아내립니다. 그들은 별 다섯 개짜리 호텔과 식당은 찬양할 수 있지만, 구유 곁에서 울리는 노래에는 무심합니다.
마음에 사람들을 향한 선의를 품은 이들은 땅에서 가장 부유한 주민들처럼 큰 기쁨을 경험합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의 승진과 행운과 성공을 기뻐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땅을 상속받습니다. 이것이 스데반이 이 땅을 떠나기 전에 부른 노래입니다. 그는 아브라함이 자기 땅을 떠난 일을 말했고, 사도행전 7:3, 요셉이 집에서 팔려 나간 일을 말했으며, 9절, 모세가 내쫓겨 미디안으로 도망한 일을 말했습니다. 21절. 이 사람은 광야 교회 안에 있던 사람입니다. 38절. 스데반이 들어가 회원이 된 교회도 똑같이 멸시받는 교회였고, 그러므로 그도 같은 대우를 받았습니다. 그때에 그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한마음으로 그에게 달려들어 그를 성 밖으로 내쫓아 돌로 치니… 그가 무릎을 꿇고 큰 소리로 외치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하더라. 이 말을 하고 잠드니라 –사도행전 7:57-60.
그러니 유향과 금과 몰약을 그분께 드리세,
농부든 왕이든 와서 그분을 주로 모시라.
왕 중의 왕께서 구원을 가져오시니,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분을 왕으로 모시라.
이것이 하나님께 영광입니다. 이것이 땅의 평화입니다. 이것이 사람들을 향한 선의입니다.
